(독자투고) '섬에서 단순하게 살아 보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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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투고) '섬에서 단순하게 살아 보기' 2

홍기 (동화 작가)

동백나무

 

모진 바람 온몸으로 받아내며

오직 침묵으로 버텨 온 세월,

이제는 성찰의 기간도 지났으니

드러내고 웃을 만도 한데

미소조차 안으로 감추고 있구나.

 

단순하게 사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이 지나치게 많은 일이다. 일을 줄이지 않으면 절대 단순해질 수 없다. 사람과 엮인 한 가지 일은 또 다른 일을 불러와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자꾸만 복잡하게 만든다.

 

일을 줄이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가능한 한 자주 자연의 맨얼굴을 대하는 것이다. 자연 속에 자연과 함께 머물러 있으면 하고자 하는 일들의 중요성이 조금씩 퇴화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일이 가치의 영역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 섬에서 기꺼이 자연의 관찰자가 되기로 하여 처음으로 관찰한 것이 동백나무다. 동백나무와 함께 동백나무 길을 걷다가 동백나무 앞에 서 본다. 눈을 살며시 뜨고 숨을 고르고 편안한 마음으로 동백나무에 눈길을 준다.

 

동백나무는 생김새가 야무져, 보고 있으면 근육 덩어리가 연상된다. 모진 바닷바람을 맞고 인고의 세월을 거치며 단련하였으니 그만한 근육이 생길 만도 하다. 지난 태풍에 소금기 머금은 바닷물을 뒤집어쓰고 유자나무는 많이 죽었는데 동백나무는 근육 덕분에 하나도 죽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근육은 고통의 결과물이다. 뼈를 깎는 단련이 없다면 근육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한번 생긴 근육은 힘으로 비축되어 어려움을 이겨낼 바탕이 되어 줄 테니 고통이라고 무작정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어차피 겪어 내어야 할 고통이라면 차라리 반기는 편이 현명하다. 반기면 그만큼 더 가볍게 여겨질 것이 뻔하다.

 

동백꽃은 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에 피기 시작한다. 시련이 다가오면 대부분 풀이 죽어 위축되거나 소극적이 되어 잔뜩 움츠리고 그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기 마련이다. 다른 꽃들이 겨울을 피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지만 동백나무는 이를 거부하고 시련의 중심부에 당당하고 꼿꼿이 서서 에너지의 결정체인 꽃을 피워낸다.

 

동백꽃은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다. 노란 꽃술을 둘러싼 속잎이 더 붉은 것은 열정을 안으로 숨긴 자취다. 꽃송이가 한결같이 아래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은 부끄러워 고개를 살포시 숙이고 미소 짓는 새색시를 닮았다. 이런 순박함이 더 마음을 끈다.

아름다움조차 안으로 숨기고 있는 모습이 침묵과 인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그 얼마만 한 눈보라와 비바람을 견뎌내었던가. 타는 갈증과 따가운 햇살은 또 어떠하였던가. 이 모든 것을 당연한 것처럼 꿋꿋한 자세로 묵묵히 참아내었다. 한마디 불평 없이 오직 침묵으로 인내하였으니 그 보상으로 봄이 오는 길목에서 가장 먼저 이런 아름다운 꽃 잔치를 벌일 수 있는 것이다.

 

침묵과 인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묶여 있다. 침묵하지 않으면 그건 이미 인내가 아니다. 많은 선지자들도 침묵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수행의 전제로 삼았다. 친정 부모가 출가하는 딸에게 벙어리 삼 년을 주문한 걸 보면 우리 조상들도 침묵의 중요성을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던 모양이다. 침묵은 힘 있는 이야기를 대신하는 묵음이다.

 

인내는 그 자체로 큰 가치가 있다. 인내함으로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고 인내함으로 더 큰 것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인내한 사람은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순간적인 충동을 참지 못하여 비참으로 떨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내는 미래를 위한 보험이다.

 

꿋꿋이 참아내면 언젠가는 그래도 그때가 참 좋았다고 웃으며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다. 그 또한 지나갈 것이니 따지고 보면 마음에 둘 이유도 없다. 지금의 대단한 일이 뒷날에는 반드시 과거의 보잘것없는 일이 된다. 심적인 어려움도 인내하여 맞서서 이겨내면 마음의 내면에 동백나무처럼 근육이 생겨날 것이다.

 

나무 아래 이리저리 떨어져 흩어져 있는 꽃송이가 눈에 들어온다. 이상하게도 시들지 않았다. 꽃이 절정일 때 떨어진 것이다. 나무에 달린 채로 시들지 않겠다는 꼿꼿한 기상이 대견하다. 내려놓을 때는 망설이지 않고 내려놓아야 함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사람들도 생의 마지막이 가까워 오면, 조금 아쉬운 맘이 들 때 건강을 유지한 채 잠자듯이 갔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는데 동백꽃은 그런 면에서도 본보기를 보인다. 동백나무를 보고 배웠다.

 

 

▲ 이 글은 홍기 동화 작가가 펴낸 섬에서 단순하게 살아 보기’ (도서출판 그루 펴냄)에 실린 내용이다. 홍기 작가는 교사로 재직하다가 정년 3년을 앞두고 명예퇴직하여 남해의 작은 섬 두미도에서 단순하고 검소하게 사는 실험을 바탕으로 이 책으로 만들었다. 그는 가리산의 눈먼 벌치기등 여러편의 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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