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여⋅순 민중항쟁기간’을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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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투고) ‘여⋅순 민중항쟁기간’을 지키자.

전남 동부지역 NCC 협동총무 김종옥

여순항쟁 사진.jpg

  

▲ 여순민중항쟁 73돌 추모제 모습

 

미 군정의 지도하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창기에 이승만 측과 박헌영 남로당의 양쪽 진영으로 나뉘이는 상황에서 미제국주의는 미군정의 수하에 둘 인물인 이승만 정부를 암암리에 지원해주면서 단독정부를 1948년 4월 3일 수립하게 한다. ‘제주도를 초토화하고 제주도민 30만을 모두 죽여도 좋다’는 명령을 내린다. 제주도를 교두보로 삼고자 하는 미 제국주의의 음모가 있었다.

 

 

제주도민이 큰 방해거리여서 제주도를 완전 초토화하도록 명했고, 이에 제도주도민은 희생양이 된다.(제주4⋅3항쟁) 1948년 8월 15일에 남한의 단독정부가 탄생하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된다. 같은 해 9월 9일 북쪽에서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해안선 5키로 이상 지역을 적정구역으로 간주하고, 그곳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을 사살하라.”는 제주 초토화 포고령이 내려진다. 이에 ‘제주도민을 학살할 수 없다.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고 봉기하며 여수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14연대와 주민들이 거룩한 항쟁에 나서게 된다.

 

 

1948년 10월 15일 제14연대 1개 대대에게 “10월 19일 22시에 제주도민을 토벌하라”는 출동 명령이 내려진다. 이에 일부 병사들은 “양심적으로 도저히 동포를 학살할 수 없다”며 ‘출동거부병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애국인민에게 호소하는 호소문’을 ‘여수 인민위원회 궐기 대회’ 때 낭독한다. 봉기군들은 여수 시민 항쟁단 ‘여수군 인민위원회’와 함께 항쟁에 나선다.

 

신월리에서 시작된 봉기군의 항쟁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10월 20일 6시경에 여수 시내를 완전 장악한다. 아침 통근열차를 나눠 탄다. 2,000여명이 순천으로 두 팀으로 나눠서 09시 30분, 10시 30분경에 순천역에 도착하고 광양삼거리(조곡삼거리, 역전삼거리)와 동천제방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첫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는 진압토벌대들이 참패하고 수많은 경찰들의 희생자가 나온다. (경찰관 330여명 사망, 부상 150여명 등 총피해자:900여명)

 

10월 20일 오후 3시경에 순천도 완전히 봉기군에 의해 장악된다. “모든 지도자는 물론 남녀 아동까지도 일일이 조사해서 모두 제거하라.”는 담화문을 10월 21일 발표한다. 그후 토벌 전투사령부가 광주에 설치되고 7개연대 총 10개 대대병력이 대 토벌작전을 감행된다.

 

10월 21일 학구전토에서 토벌군에 의해 패배한 봉기군은 투항하거나 지리산, 백운단 일대로 입산해 빨치산이 된다.

 

10월 22일 현지 사령관 제 5여단 명의로 “여수-순천에 ‘반도’를 숨겨 두거나 연락만 해도 사형에 처한다”는 비극의 ‘계엄령’을 선포된다 (반군토벌 사령관 송호성)

 

10월 22일 여수에서는 제 5연대 해군 박격포가 설치되고, 1차 여수 상륙작전이 시도된다. 이때 봉기군들은 ‘허수아비 작전’으로 방어한다.

 

여순사건을 ‘국군 제 14연대 반란’으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을 만들다.

10월 23일 순천은 토벌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다. 한편 여수에서는 잉구전투(미평전투)에서 봉기군이 지역민들과 합세해 승리한다.

 

10월 24일 여수,순천 지역에 부역자 색출이 시작되여 민간인 피해가 속출하게 된다. (순천 농업학교(현 순천대학교) 에서 박찬길 검사 외 21명 즉결처형)

 

10월 25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령 13호 여수 순천에 계엄령이 선포된다. (계엄법은 1949년에 정식 제정됨. 민간인 처형은 위헌 위법의 소지가 있다. 는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엄령을 선포한다.)

 

여수 순천지역에 대대적인 대 토벌작전이 시작된다.

10월 26일 토벌군과 시민군 사이에 5차례 치열한 교전이 발생한다.

(여수전역)

 

10월 27일 토벌군은(육-해-공군 한-미 합동 작전에 함포를 앞세운 여수점령: 미군 개입 )봉기군의 항쟁을 일단락시켜 버린다. 주한 미 육군사령부(이하: 임시군사고문단 1948년 8월 24일 조직. 1948년 –1953년까지 활동 )와 이승만 정부의 빨치산 소탕작전이 이어진다.-주한 미군사고문단 부관부 문서-

 

 

여수 ,순천지역에서는 부역자 색출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이뤄지고, 여수는 이 과정에서 온 시내가 불바다가 되며 초토화가 되고 만다.

 

이러한 무자비한 진압과정에서 군인-경찰뿐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 대학살이 자행되여 무고한 민간인들 수 만명이 죽게 된다.

 

정권을 잡기 위해 반란사건이라고 규정한 자들인 이승만 정권과 그 하수인들, 미국이 국가폭력의 1차 직접 가해자, 책임자요. 여순항쟁의 2차 책임자는 비양심적으로 양민학살에 가담한 자들이요, 토벌군인을 파견한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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